1. 이제는 들을 수 있다. 오픈형 이어폰계의 스테디셀러, E888
일단 가격대의 부담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가장 큰 강점으로 작용하는 E888입니다. E868 좋아라~ 하던 그 시절, 당당히 음향기기상점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죠. 가격도 9~10만원에 육박했고. 언제나 머나먼 당신일 줄만 알았던 그 물건을 손에 받아든 순간의 두근거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군대에서 처음 E888을 접하게 될 줄은... 기구한 인연인가?)
이미 이 글을 관심있게 보실 만한 분이라면 대충 저 녀석의 특징이나 이론적 스펙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계실테니 그런 딱딱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바로 사용소감 들어갑니다.
내구성 딱 봐도 약하게 생겼습니다. 손이 다 벌벌 떨립니다. 특유의 잠자리케이스에 말려있는 선이 다 눌려서 자국도 남아있고... 누구나 이 타이밍에서 하게 되는 생각은 똑같을거라 봅니다. 예전 E700(Cresyn) 때처럼 선 펴겠다고 매달아놓는 뻘짓거리는 안 하겠지만, 아니 못 하겠지만. -_-; (그래도 2년 가까이 썼네요.) 그냥 자연스럽게 두고 풀리도록 해 줍시다. 보관은 내부에 스펀지 처리 되어있는 안경집을 이용합니다. u형 케이블의 분기점을 잡고 둘둘만 뒤에 안경 케이스 중간을 기준으로 유닛부와 감긴 코드부를 분리해서 최대한 단선의 위험이 없도록 보관해 줍니다. (근데 어차피 잠잘 때 끼는데 의미가 있을까... 하는 건 넘어갑시다.)
자 이번엔 소리. 처음엔 좌우 밸런스가 안 맞습니다. L이 R보다 음압이 더 높죠. (안 그런 경우도 있긴 하다던데 잘 모르겠습니다.) 이거 예전 868쓸 때도 이런 적 있었던 것 같은데... 하여간 이건 사용하면서 차츰 개선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한 3개월 된 것 같은데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네요.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E888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한없이) 따뜻하고 풍부한 음색' 일 겁니다. 사실 한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도 어폐가 있습니다. E888을 귀에 꽂고 있다보면 별별 생각이 다 들기 때문이죠. 카랑카랑하고 선명한 고음과 강렬한 타격감을 가진 E700하고는 완전 정 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저 E700에 길들여져 있던 귀가 쉽게 여타 리시버를 받아들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뒤에서 좀 더 언급하겠지만) E888엔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뭐부터 이야기할까요. 일단 해상력이 매우 좋은 편은 아니지만 평균 이상은 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놈의 바이오셀룰로오스 진동판이 표현해 내는 소리의 섬세함은 기가 찰 정도네요. 타 리시버에서는 들을 수 없던 미세한 울림이나 작은 스트링 소리 하나도 놓치질 않습니다. 거기에 어지간한 리시버가 따라가지 못할 중음역과 저음역의 풍부한 음색, 보컬과 음악의 조화도 상당히 훌륭합니다. 은은하면서도 깊게 울려주는 초저음역 또한 일품. 고음역은 확실히 쭉 뻗는 맛은 없고 약간 밋밋하게 들리지만 할 만큼은 해준다는 느낌. 웅장한 스테이징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솔직히 그냥 울려대는 건 취향이 아니기도 하지만) 공간감 또한 괜찮은 편입니다. 타격감이 약하고 하이햇의 경우 분명 찰랑찰랑이 아니라 말랑말랑에 가깝지만, 그런 단점 마저도 그냥 자체적으로 소화해서 거슬리지 않게 만들어버린달까, 그런 느낌입니다.
E700은 듣고 있다보면 금방 귀가 피로해져서 리시버를 귀에서 빼게 만드는 반면, 888은 마냥 듣고 있어도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기만 하다는 표현, 누가 처음 썼는지는 모르지만 엄지손가락 하나 치켜세워주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선명하면서 쭉쭉 뻗어주는 고음을 좋아하고, 여성 보컬곡들을 많이 듣는 만큼 888을 선택하는데에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실제 몇개월 사용해 보면서 느끼는 건... 역시 명불허전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 다른 건 몰라도 888은 정말 하나쯤 가지고 있을 가치가 있는 오픈형 이어폰이 아닌가 합니다.
밤의 황제라는 별명답게 잘때 음악듣기 참 좋습니다. 클래식 계열에 베스트매칭이고, 개인적으로는 김동률 5집을 888로 들을 때 얻게되는 만족감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사실 올라운드형이라고 봐도 될 것 같은데요. 음 하여간 괜찮은 경험이었습니다.
2. 네 이놈, 대체 정체가 뭐냐!? ES103
이것도 아실 분은 아실겁니다. 이걸 좀 쓰다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 정말 이 가격에 이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라던가 '아 인생 헛살았나...' 이건 좀 아닐지도. 하여간 제대로 한 방 먹게되는 물건이 바로 유비코라는 국산 오픈형 리시버, ES103입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고음괴물'. 이거 말고는 딱히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A8 이런거 들고나오시면 곤란합니다. 가격차이가 몇십배인데요. (...) 저는 경제적 측면을 무시하고 살 수 있는 종족이 아닌지라 가격대 성능비라는 스펙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고음 정말 미쳤어요. 딱 처음에 들으면 헐~ 소리밖에 안 나옵니다. 음색의 선명함, 뚜렷한 해상력, 쭉쭉 뻗어주는 맛까지... 딱 제취향입니다. 여성보컬, 특히 물건너 나라 K모양이나 L모양 보컬 들으면 그냥 미쳐버리는겁니다. 중음역대도 나름대로 잘 잡혀있고 타격감은 그럭저럭. 원체 해상력이 좋은편이라 명확한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저음은 좀 많이 똘똘 뭉쳐있는 느낌. 최소한의 저음EQ로 커버치고 들으면 음... 들어줄만은 합니다. (절대 좋아진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딴거 다 제끼고, 귀가 피곤하니 뭐니 (이 가격에) 이런 고음 나오면 제 입장에서는 그저 진리인겁니다. 아웃도어에서 막굴리는 오픈형 이어폰으로 고음 위주의 성향을 최대한 살리는데 이만한 리시버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건 왠지 몇 개쯤 쟁여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물건입니다. 단선이 잘 된다는데 말이죠. 일단 선 재질이나 코드 연결부분 보완된 수정판은 ES303SE와 같은 [크롬색] 같습니다. 흰색도 한 번 봤는데 확실히 선재가 말랑하고 때도 잘 탈 것 같으며 플러그부분이 좀 단선우려가 심하더군요.
이건 888과 정 반대의 이유로 오랫동안 소유하고 싶은 리시버입니다. 놀라워요 정말.
3. 이제 슬슬 지치는데... 넌 또 뭐하는 놈이냐. ES303SE
여기서 궁극형을 바라던 저는 살짝 긴장했습니다. 이거 듣고 쓰러지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ES303SE는 기존 모델인 ES303에서 지적받던 똥같은(...) 보컬을 개선해서 보컬이 상당히 앞으로 나왔고, 그에 반해 저음량을 좀 줄였다는 개선판이자 한정판(?)인 물건입니다.
일단 ES103때와 같이 (아 위에선 언급안했네. ES103이나 ES303시리즈에 사용되는 더블돔 진동판이라는 게 있습니다. 고음 저음 중 하나라도 포기 못하겠다는 뭐 그런 물건입니다.) 해상력은 정말 좋은데, 음이 붕 뜬 느낌이 납니다. 그리고 E700의 상쾌함과 강렬한 타격감에 길들여져서 그런 것 같진 않은데 객관적으로 봐도 음색이 탁합니다. 888은 상쾌하다기보단 깔끔한 맛이 나서 걸리는 부분이 없었는데 이건 확실히 탁하다는 게 느껴집니다. 리뷰에서 흔히 보이던 '적응해야 하는 소리'라는 게 실감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면, 왜 같은 진동판 쓰는 ES103 때는 이 얘기가 안 나왔느냐? ES303SE의 고음이 ES103을 못 따라가거든요. 쭉 뻗어주는 맛이 확 줄어들면서 분명히 음은 선명하게 내 주는데도 불구하고 체감 차이가 생각외로 크게 느껴집니다. 분명 가격대 성능비를 따지면 매우 좋은 이어폰임에는 분명한데, 너무 올라운드를 추구하다보니 오히려 어정쩡해진 물건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특유의 탁한 음색이 개인적으로 계속 신경쓰이는 건 아무래도 E700의 추억이 너무 진하게 남아있어서... 그 추억을 지울만한 임팩트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ES303도 들어봤어요. 잠깐이지만. SE와 비슷하게 좋은 해상력에다 끝내주는 저음량을 자랑하며 V자형 EQ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벗뜨 역시 보컬이 너무 죽어버린... 달까 보컬은 정말 별로. 하지만 특색있는 부분이라던가 전체적인 밸런스를 생각하면, ES303SE는 ES303의 단점을 보완하고 음밸런스를 좋게 만들려다가 오히려 밋밋해진 케이스랄까.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y자형에서 SE로 오면서 Y자형으로의 변경이 있었는데(선 재질 또한 변경) 이게 문제가 되는게 Y자형은 늘 그렇듯이 집게가 없으면 터치노이즈가 영 신경쓰인다는 거. 그리고 부싱(세로로 길쭉한 부분) 끝 재질이 별로이기도 하고 케이블이 나가는 공간의 구멍이 너무 좁다보니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 그 부분에서 마찰음이 끼기긱 끼기긱 계속 들리는게 상당히 거슬립니다. 오히려 103보다는 이쪽을 888 대신의 아웃도어 용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단점 때문에 밖에서 쓰기가 좀 번거로운 물건입니다.
보컬이 죽는게 싫어서 SE를 선택했는데 오히려 평범한 평가를 제게 얻고 말았던 비운의 ES303SE.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수많은 유저들에게 하이엔드급으로 칭송받는 뛰어난 물건이라는 사실입니다. 뭐 어디까지나 취향문제가 있는거니까요. 그 특유의 탁한 음색이 거슬리지 않는 분들이라면 어지간한 고가 이어폰들의 대안으로 ES303SE를 선택하더라도 부족함이 전혀 없으실 겁니다. 악평을 줄줄이 해놓고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좋긴 좋아요. 저한테 제대로 찍혀서 그렇지. s( -_)z
ps. 여기까지 써놓고 문득. E700 정말 그립습니다. 앙흥엉흥. EP800은 어떨런지 궁금.
ps2. 본 사용기는 더 장시간 사용 후에 임의로 수정될 수 있습니다.